[홍재민] 운이든 뭐든 하여튼 울산은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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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용
한국프로축구연맹

1974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서독은 네덜란드와 만났다. 당시 네덜란드는 아약스의 유러피언컵(현 챔피언스리그) 3연패 멤버들을 보유한 팀이었다. 경기 시작 1분 만에 네덜란드의 요한 크루이프가 페널티킥을 획득했고, 요한 네스켄스가 성공시켰다. 볼을 한 번도 건드리지 못한 채 선제 실점을 내준 서독 선수들은 망연자실했다.

아시다시피 이날 승자는 서독이었다. 25분과 43분에 각각 골을 터트려 승부를 뒤집었다. 터프한 몸싸움과 프란츠 베켄바우어의 압도적 경기 지배가 승리 원동력이었다. 뜻밖의 결과에 사람들은 흥분했다. 어떻게 강한 네덜란드가 패할 수 있지? 경기 후, 베켄바우어는 “강한 자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긴 자가 강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일상에서 우리가 듣는 ‘잘하는 사람이 오래 버티는 게 아니라 오래 버티는 사람이 잘하는 것이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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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2일 K리그1 3라운드에서 울산현대는 FC서울을 2-1로 꺾었다. 개막 3연승, 승점 9점이다. 서울은 개막 2연승 이후 시즌 첫 패를 당했다. 경기 장소가 서울월드컵경기장이라는 사실은 크게 작용하지 않았다. 울산은 2017년 10월 28일 이후 K리그에서 16경기째 서울을 상대로 무패 행진을 이어갔다. 1974년 월드컵 결승전과 달리 이날 서울과 울산의 맞대결 결과는 객관적 전력 그대로 나왔다.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처럼 강한 울산이 약한 서울에 이겼다.

울산 데뷔골을 신고한 주민규는 “운이든 뭐든 승점 쌓는 게 강팀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길 팀이 이겼는데 홍명보 감독부터 주민규까지 무척 기뻐 보였다. 그만큼 어렵게 이겼다는 심리적 만족감일 것이다. 경기를 본 사람이라면 울산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다. 선제 실점을 내준 경기가 막판에 가까스로 뒤집혔다. 두 골 모두 서울의 치명적 실수가 준 선물이었다. 이날 울산은 슛을 8개밖에 기록하지 못했다. 홍명보 감독은 “그 전까지 과정이 좋았다”라고 항변했다. 슛으로 마무리되지 않는 과정을 과연 “좋았다”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홍 감독의 말은 마이크 앞에 선 리더의 방어기제였다.

반대편에 있는 서울에서도 방어기제가 작동했다. 안익수 감독은 최철원의 실수를 “경기 중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런 일을 두루뭉술하게 표현하는 것 또한 프로구단 감독이 갖춰야 할 능력 중 하나다. 82분 서울의 페널티박스에서 발생한 사고(?)는 영화 <베테랑>의 명장면 “어이가 없네”를 연상시킨다. 동료의 백패스를 손으로 잡은 ‘본헤드 플레이’(요즘 WBC라서 한번 써본다), 그리곤 아타루에게 볼을 순순히 내주는 페어플레이(?)는 안 감독의 말처럼 벌어질 수는 있지만,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 일이다.

최철원

‘초크’는 신체 혹은 심리적으로 장기간 단련한 기억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현상이다. 초크 현상은 드물게 일어난다. 2014년 FIFA월드컵 H조 1차전에서 러시아의 이고르 아킨페프는 이근호의 슛을 뒤로 빠트려 선제 실점을 내줬다. 2018년 UEFA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리버풀은 로리스 카리우스의 치명적 실수 2개로 눈물을 흘렸다. 2019년 K리그 최종전에서 울산은 김승규의 스로인 실수로 우승 꿈을 날렸다. 울산전 최철원의 플레이는 초크 현상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차라리 천재지변이었다고 하든가.

울산은 승점 3점을 획득했다. 좋게 말하면 집념의 승리, 나쁘게 말하면 운 좋은 승리다. 어느 쪽이든 ‘승리’로 끝난다는 게 제일 중요하다. 바코의 패스는 기성용의 발에 맞아 주민규의 이적 첫 골을 도왔다. 마틴 아담의 스로인은 최철원의 실수와 아타루의 영리함을 거쳐 이청용의 역전골로 이어졌다. 내용이 꽉 막혔다고 해도 홍명보 감독은 승점 3점이란 목표 지점에 도착했다. 패할 경기에서 비기고, 비길 경기에서 이기는 힘은 강팀의 기본 요소다. 지난 시즌 우승이 울산 선수들에게 신념을 심었다. 이겨서 강자가 되는 요령의 체득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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